시민사회의 주도성 회복이 시급한 한국의 사회적기업
박상유 한겨레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
kronos@hani.co.kr
대부분의 조직이 그러하듯 사회적기업도 사회적 필요의 산물이다. 따라서 사회적기업 역시 그가 속한 사회의 특성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는 특히 서구에 확산되고 있던 사회적기업의 개념을 취약계층의 노동통합과 부족한 사회서비스의 제공이라는 정책적 목표를 위해 ‘수입’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서구의 그것이 어떤 고민에서 출발해 어떤 방식으로 제도화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사회적기업 정책을 이해하고 대안을 모색하는데 나름의 의미가 있다.
유럽의 사회적기업의 경우, 198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한 사회연대협동조합(social solidarity cooperatives)을 본격적인 출발로 보는 견해가 많다. 물론 19세기 영국의 로치데일 파이어니어(Rochdale Pioneer)를 비롯해 유사한 움직임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Social Enterprise Coalition, 2003). 하지만 그 당시의 결사체 운동은 다분히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 성격이 강했고, 국가나 시장에서 배제된 ‘노동자의 필요’에 집합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에 반해 이탈리아의 사회연대협동조합은 정부의 재정 축소 등에 따라 심화된 사회적 양극화와 배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필요’에 부응한 성격이 강하다(장원봉, 2008). 당시 이탈리아 정부는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서비스 영역에 투자하던 예산을 점차 줄여 나갔고, 당연히 사회서비스 영역의 공백이 점차 가시화됐다. 공공 부문에서 책임지던 사회서비스 영역에서 빈 공간이 드러나자, 이러한 공백을 메울 대안적 형태로 사회연대협동조합들이 대거 나타난 것이다. 정부를 대신해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이들 조직이 활동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 이탈리아의 사회적협동조합법(1991)이다. 이 법은 사회연대협동조합을 포함한 유사한 조직들을 사회적협동조합(social cooperatives)이란 이름으로 묶고, A타입과 B타입으로 나누어 정의하고 있다. A타입은 사회적서비스 협동조합으로 (구성원이 취약계층인가에 무관하게) 부족한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조직을 이르고, B타입은 (제공하는 서비스와 상관없이) 취약계층의 고용을 우선적 목적으로 하는 노동통합형 조직을 가리켰다.
이처럼 정부의 재정 축소에 따라 사회적 복지가 후퇴하는 국면에서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의 주체로 나서 사회서비스 공백을 메우는 사회적기업 ‘운동’이 정부의 협력에 힘입어 ‘제도’로 정착되고, 다시 다른 국가에 번져 나가게 되는 현상은 유럽의 사회적기업들이 사회에 뿌리내리는 중요한 방식이 되었다. 벨기에의 사회적목적기업(1995), 캐나다 퀘벡의 연대협동조합(1997), 포르투갈의 사회적연대협동조합(1998), 스페인의 사회적협동조합(1999), 프랑스의 공익협동조합(2001), 핀란드의 노동통합사회적기업(2003), 영국의 지역사회이익기업(2004), 이탈리아의 사회적기업(2005), 폴란드의 사회적협동조합(2006)들이 법적 지위를 확보하는 과정은 이탈리아와 매우 유사했다(장원봉, 2008 등).
한편, 유럽에서도 영국은 이러한 움직임과는 조금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2002년 영국 무역산업부(Department of Trade and Industry)는 "사회적기업: 성공을 위한 전략"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여기서 사회적기업을 하나의 비지니스로 정의하는 매우 폭넓고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었다(Defourny).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 사회적기업은 부족한 사회서비스를 보완하거나 취약계층의 고용을 창출하는 등 ‘복지’의 영역에 속한 문제였으나, 영국은 이에 더해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경제 주체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것이다. 사회적기업을 사회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새로운 방식일 뿐 아니라 경제적 활동을 하는 비즈니스로 인식하고, 경제와 산업정책을 주무로 하는 정부부처가 사회적기업을 하나의 정책 과제로 추진한 것은 이전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몇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책 기조는 일정하게 유지되어, 신설된 제3섹터청(the Office of the Third Sector; OTS)에서 보건, 복지, 지역 및 사회서비스, 교육 등의 광범위한 업무를 통합하여 경제 활성화와 연결해 나가고 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사회 안에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기업적 활동들을 일정한 제도의 틀로 묶어 이들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것을 통해 활성화를 지원했다면, 영국의 정부는 경제적 관점에서 사회적기업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기업을 지원한 셈이다.
이렇듯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사회적기업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들의 자발적 결사체 운동의 전통은 중요하다.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기존의 경제 체제가 만들어 내는 문제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안적 경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에 기반한 호혜의 경제, 즉 사회적 경제라는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갖게 된 것이다. 70, 80년대 유럽에서 복지국가로서의 정책이 후퇴할 때 또는 세계화의 여파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될 때, 유럽인들이 사회적 경제에 기반한 구조를 떠올리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드푸르니 등이 사회적기업을 비영리기관과 협동조합의 중간자적 성격으로 이해하는 것도 유럽의 사회적 경제 전통에서는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의 전통이 취약한 미국은 유럽과는 다른 발전 양태를 보였다. 재단을 중심으로 한 비영리기관에 익숙한 미국에 있어 80년대 보조금의 삭감은 비영리기관들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비영리기관들은 추구하는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보조금 수입을 대체할 사업을 필요로 했고, 이러한 사업은 그들의 미션을 달성하는 하나의 수단이어야만 했다. 이렇게 동시에 달성하기 어려운 두 가지 목표, 즉 비영리기관으로서의 미션과 경제적 수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업을 사회적기업으로 부른 것이다. 따라서 수익사업이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적 목적을 수행하는데 자금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수익이 창출되는 과정이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적 목적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다른 프로세스로 작동되더라도 사회적기업으로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미국의 사회적기업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흐름은 사회혁신모델로서의 사회적기업이다. 이는 기존의 정부와 비영리기관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기업 부문의 효율성과 혁신적 접근 방법을 적극적으로 차용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사회적기업들의 운영이 연대를 통한 공동체 개념 보다는 레버리지를 통한 사회 문제의 혁신적 해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거나, 대학에서도 복지학이나 사회학이 아닌 경영학 과정에서 사회적기업가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일반 기업이 사회적기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런 문화에서 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경우, 사회적기업의 뿌리를 1980년대 말 빈민지역을 중심으로 한 생산공동체 운동에서 찾기도 하지만(신호균 외, 2009 등),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사회적기업은 역시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나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의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되, 특히 고용노동부의 인증을 받은 조직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기업들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것을 통해 시민사회의 자발적 움직임을 수용하는 서구적 접근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정부가 사회적기업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방식이다.
1990년대 후반의 외환위기에서 촉발된 대규모 실업과 저소득층의 빈곤 심화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는 공공근로사업과 각종 자활사업, 사회적 일자리 사업 등을 잇달아 시행했으나, 상당한 재정 부담에도 불구하고 단기적이고 임시적 일자리를 양산했을 뿐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재정 부담을 완화하면서도,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정책 과제가 사회적기업의 도입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서구의 사회적기업들이 취약계층 고용과 사회서비스 제공에 있어 대부분 정부의 직접적 지원과는 거리를 두면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데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사회적기업이 시민사회의 창의성과 자발성에 근거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델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라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정부의 실패에 대해 시민 사회가 주도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그 결과를 다시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서구의 사회적기업이 성장하는 방식이었는데, 한국의 경우 정책 실패의 해결에 있어 시민사회를 주체가 아닌 객체로 두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잇달아 사회적기업 육성 방안을 쏟아 내고, 기업 부문의 참여를 유도하고, 그 효과를 정부에서 검증하는 현재의 구조는 정책 효율성 제고를 위한 정부 주도의 노력일 뿐 시민사회는 역할을 축소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산물인 사회적기업이 한국에서 끊임없이 지속가능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J. Defourny & EMES European Research Network, Social enterprise in an enlarged Europe: Concept and realities
Social Enterprise Coalition(2003), There's more to business than you think; A Guide of Social Enterprise
장원봉(2008),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운동
신호균, 김영애, 장홍메(2009), 사회적 기업에 대한 국제적 비교: 한중일을 중심으로
좋은 정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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